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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이 일상이 된 시대에 한국 경제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더 많이 생산하면 정말 더 나은 사회가 되는가. 성장의 숫자가 커지면 삶의 질도 함께 나아지는가. 10일 서울 한국고등교육재단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2026 가치와 성장 포럼’은 바로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답을 기존의 성장 공식 바깥에서 찾으려 했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이 주최한 이번 포럼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 학계·정책 전문가, 기업 관계자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포럼의 주제는 ‘저성장 돌파구, 솔루션 변화’였다. 겉으로는 경제 포럼이었지만, 실제로는 성장의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하려는 문제 제기에 가까웠다.
첫 번째 세션에서 제기된 진단은 무겁고도 익숙했다. 한국 경제는 이미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 올랐지만, 소득 격차와 삶의 질, 지역 불균형, 인구 소멸 같은 사회적 지표는 그에 걸맞은 개선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임동균 교수는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이 분리된 상태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고,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이재원 원장 역시 잠재성장률 하락과 양극화 심화가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성장과 사회를 따로 다루는 기존 모델이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성장의 부작용이 더 이상 부수적 비용으로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소득 격차는 소비를 위축시키고, 지역 불균형은 인구 소멸과 공동체 해체를 낳으며, 사회 갈등은 복지와 행정 비용을 키운다. 즉, 사회문제는 성장의 외부에 있는 변수가 아니라, 성장 자체를 갉아먹는 내부 비용이 되었다. 이 점에서 이번 포럼은 중요한 전환점을 짚었다. 이제 성장 전략은 GDP(Gross Domestic Product·국내총생산·한 나라 안에서 일정 기간 만들어진 재화와 서비스의 총가치)를 높이는 방법만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구조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식은 두 번째 세션에서 보다 구체적인 제안으로 이어졌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사회성과인센티브(SPC·Social Progress Credit·사회적경제조직이 해결한 사회문제를 화폐단위로 측정하는 방법론)를 ‘가치 기반 성장’의 실험 사례로 제시했다. SPC는 사회문제 해결 활동에서 발생한 성과를 측정하고, 이를 경제적 가치로 인정해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구조다. 쉽게 말해 사회적 가치를 공익적 선의에만 맡기지 않고, 측정할 수 있는 성과로 환산해 경제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다.
발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468개 기업이 SPC 프로젝트에 참여해 총 5,364억 원 규모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했고, 이에 비례해 약 769억 원의 현금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더욱 눈에 띄는 대목은 성과 기반 인센티브가 단지 ‘착한 일에 대한 보상’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센티브를 받은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사회적 성과를 약 3배 더 창출했고, SPC 참여 기업은 미참여 기업 대비 평균 매출도 더 높았다. 사회적 가치가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 하나의 실증적 근거가 제시된 셈이다.

세 번째 세션에서는 기업 현장의 사례가 이어졌다. 수퍼빈 김정빈 대표는 순환경제 기반 사업 모델을 통해 환경 문제 해결과 경제적 보상을 연결하는 구조를 설명했고, 우주(WOOZOO) 김정현 대표는 청년 주거 문제 해결을 시장 친화적 사업 모델로 풀어낸 경험을 공유했다.
이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사업성이 반드시 약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적절한 보상 구조와 참여 구조, 투자자를 설득할 수 있는 경제 언어가 갖춰지면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성과는 함께 확장될 수 있다.
포럼의 무게중심은 마지막 대담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은 사회문제 해결과 경제 성장을 동시에 달성하려면, 정부 정책과 민간 혁신이 함께 작동하는 새로운 성장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사회연대경제 기본법 제정, 금융 지원 확대, 공공서비스 참여 확대 등을 통해 사회문제 해결 기반을 제도적으로 키워가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최태원 회장의 문제의식도 명확했다. 그는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를 단순한 성장 둔화가 아니라, 내수 부족과 사회적 비용 증가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적 위기로 진단했다. 기존처럼 GDP 증가만을 성장의 기준으로 삼는 방식으로는 양극화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결국 그 비용은 다시 경제 전체를 제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성장 모델은 경제 성장과 사회적 비용 감소를 동시에 달성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가치의 측정과 보상 시스템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목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가치 담론은 종종 선언적 언어에 머물렀다. 공공, ESG(환경·사회·지배구조-Enviroment·Social·Governance), 사회적경제, 지속 가능성 같은 단어는 널리 회자됐지만, 그것이 실제로 기업의 투자 판단과 시장의 보상 체계, 정부의 정책 설계안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이번 포럼이 가진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적 가치를 ‘좋은 일’의 영역에 묶어두지 않고, 성장 전략의 중심으로 끌어오려 했다는 점이다. 물론,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어떤 성과에 어떤 보상을 부여할 것인가, 공공의 목표와 시장의 동기를 어떻게 정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
자칫 측정 지표가 형식화되거나, 보상 체계가 또 다른 행정 부담으로 변질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구호가 아니라, 정교한 제도 설계다. 사회적 가치가 성장의 언어가 되려면 도덕적 당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이 납득할 수 있는 계량성과,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비용 효율성,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삶의 개선이 함께 입증되어야 한다.
이번 포럼이 던진 방향은 분명하다. 이제 성장의 정의는 바뀌어야 한다. 많이 만들고, 많이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국가의 건강성을 설명할 수 없다. 성장의 결과가 양극화와 지역 소멸, 삶의 불안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완전한 성장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앞으로의 성장 전략은 생산 확대만이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 삶의 질 향상, 공동체 회복까지 포괄해야 한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을 돌파하려면 새로운 산업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성장 문법이 필요하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서로 다른 장부에 적어 놓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둘을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번 포럼은 그 가능성을 보여 준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성장은 숫자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어떤 비용을 줄였고, 어떤 삶을 지켰으며, 어떤 공동체를 회복시켰는가까지 함께 묻는 순간, 비로소 성장도 다시 미래를 가질 수 있다.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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